강룡십팔장과 좌우호박이 이상하다고 느꼈을 때, 게임이 소설보다 먼저였다 – 의천도룡기 외전

의천도룡기 외전

컴퓨터 속으로 빨려 들어간 주인공

의천도룡기외전의 시작은 지금 생각하면 꽤 파격적이었다. 게임을 하던 플레이어가 컴퓨터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현실 세계로 돌아가려면 무림에 숨겨진 14권의 비법서, 이른바 십사천서를 모두 찾아야 한다. 이 14권은 김용이 쓴 소설 14부를 그대로 모티브로 한 것이었는데, 어릴 때는 그게 실제 소설 제목인 줄도 몰랐다. 그냥 “게임 안에 책 14권이 있구나” 정도였다. 게임을 깨려면 무림의 여러 장소를 돌아다니며 이벤트를 완수하고, 무공을 배우고, 십사천서를 하나씩 모아야 했다.

정식 제목은 김용군협전(金庸群俠傳)이고, 1996년 대만 지관(智冠)이 개발한 DOS용 RPG다. 한국에는 의천도룡기외전이라는 이름으로 한글판이 정식 발매되었고, 대사와 메뉴가 모두 한글이었기에 스토리를 따라가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공략 없이는 못 깨는 게임

이 게임은 공략 없이 하기에 정말 어려운 게임이었다. 자유도가 높아서 어디든 갈 수 있었지만, 그 자유가 오히려 독이 됐다. 어디를 먼저 가야 하는지, 어떤 이벤트를 완수해야 다음 무공을 배울 수 있는지, 동료를 어떻게 합류시키는지 — 이 모든 것이 명확한 안내 없이 진행되었다. 잘못된 순서로 가면 몬스터에게 한 방에 죽었고, 중요한 아이템을 지나치면 되돌아갈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인터넷이 지금처럼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 공략집 없이 십사천서를 전부 모으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형도 나도 끝까지 깨지 못했다. 중간까지 진행하다가 막히면 처음부터 다시 하고, 또 막히고, 결국 포기하는 것을 반복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배운 무공의 이름, 만난 캐릭터의 이름, 돌아다녔던 마을의 이름은 머릿속에 남았다. 그리고 그것들이 훗날 소설을 읽을 때 전부 살아났다.

강룡십팔장과 좌우호박이 이상하다

게임에서 배울 수 있는 무공 중에 좌우호박이라는 기술이 있었다. 주백통에게 배우는 기술로, 한 턴에 두 번 공격할 수 있는 사기 스킬이었다. 또 곽정이 사용하는 강룡십팔장은 게임 내 최강급 장법 중 하나였다. 어릴 때는 그 이름이 당연한 줄 알았다. 좌우호박, 강룡십팔장. 게임에 그렇게 써 있으니 그게 맞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다른 곳에서는 좌우호박이 아니라 쌍수호박이라고 불렸다. “雙手互搏”, 양 손이 서로 치고받는 무공. 게임 한글판에서 “좌우호박”이라고 번역했던 것이 다른 매체의 명칭과 달랐던 것이다. 강룡십팔장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순간부터 항룡십팔장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보게 됐다. 이상하게 생각해서 찾아보니 한자 “降”의 읽기 문제였다. 降을 “내릴 강”으로 읽으면 강룡(용이 내려온다), “항복할 항”으로 읽으면 항룡(용을 굴복시킨다)이 된다. 고려원에서 나온 영웅문 초판이 “강룡십팔장”으로 번역했기에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그 이름으로 통용되었고, 게임 한글판도 같은 표기를 따랐다. 이후 김영사 정식 번역판에서 “항룡십팔장”으로 바로잡으면서 정식 명칭이 바뀌었지만, 나에게는 게임에서 먼저 본 “강룡십팔장”이 원래 이름이었다.

게임이 소설보다 먼저였기 때문에 생긴 혼란이었고, 그 혼란이 오히려 두 이름을 모두 평생 잊지 못하게 만들었다.

게임이 소설의 입구가 되었다

녹정기 글에서도 썼지만, 의천도룡기외전이야말로 김용 소설을 읽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게임 안에서 장무기, 곽정, 양과, 소용녀, 주백통, 홍칠공 같은 이름을 먼저 만났고, 그 캐릭터들이 어떤 소설에서 왔는지를 나중에 알게 되었다. 십사천서의 14권이 김용의 실제 소설 14부라는 것도 소설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게임에서는 그저 아이템이었던 책들이, 실제로는 수십 권짜리 대하소설이었던 것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게임에서 겪었던 이벤트가 어느 장면에 대응하는지 하나씩 연결되는 느낌은 독특한 즐거움이었다. 백화곡에서 주백통을 만나 좌우호박을 배우던 장면이 소설 사조영웅전 속 주백통의 에피소드와 겹쳤고, 도화도의 풍경이 문자로 다시 그려졌다. 공략 없이 헤매던 시간이 아까운 게 아니라, 그 헤맴 덕분에 소설 속 지명과 인물이 더 생생하게 다가왔다.

십사천서를 다 모으지 못한 어른

어른이 되어 인터넷 공략을 보며 의천도룡기외전을 다시 플레이한 적이 있다. 어릴 때 절대 못 찾았던 비법서의 위치, 동료 합류 조건, 숨겨진 이벤트 순서를 하나씩 확인하면서 진행했다. 공략을 보면서 하니 어릴 때의 막막함은 없었지만, 대신 모든 것을 스스로 발견하던 그때의 설렘도 없었다. 이 게임은 공략 없이 하면 너무 어렵고, 공략을 보면 너무 쉽다. 그 사이 어딘가에 최적의 경험이 있었을 텐데, 나는 양쪽 극단만 경험한 셈이다.

지금도 의천도룡기외전은 고전게임 커뮤니티에서 사랑받는 타이틀이다. 밸런스 수정 패치, 극악 난이도 패치 같은 팬 제작 버전이 꾸준히 나오고, 2018년에는 정식 후속작 격인 하락군협전(河洛群俠傳)이 스팀으로 발매되기도 했다. 의천도룡기외전의 주인공 이소룡이 워프를 통과한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는 3D 오픈월드 RPG다.

하지만 내 기억 속 의천도룡기외전은 공략 없이 헤매던 도트 그래픽 화면이고, 강룡십팔장이라는 이름이 맞는지 틀린지도 모른 채 신나게 쓰던 그 전투 장면이다. 게임이 나에게 소설을 선물해줬고, 소설이 게임의 이름을 바로잡아줬다. 그 순환이 아직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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