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트리지에서 CD로
내 기억의 첫 번째 게임기는 슈퍼패미컴이었다. 회색 카트리지를 “딸깍” 꽂고 전원을 켜면 시작되는 세계. 그게 내가 아는 게임의 전부였다. 두 번째 게임기는 세가 새턴이었다. 이번에는 카트리지가 아니라 CD였다. 반짝이는 원반을 트레이에 올리고, 뚜껑을 닫고, 전원을 켜면 “위이잉” 하고 디스크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만으로 뭔가 다른 시대가 시작되는 느낌이었다.
1994년, 게임 업계에서는 이른바 ‘차세대 게임기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세가 새턴은 1994년 11월 22일에 일본에서 44,800엔에 발매됐고,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은 불과 열하루 뒤인 12월 3일에 39,800엔으로 뒤따랐다. 5,000엔 더 싸게. 닌텐도 슈퍼패미컴 시대까지 만년 2위였던 세가가 이번에야말로 역전하겠다고 야심 차게 내놓은 기기였지만, 결국 플레이스테이션에 밀리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는 비운의 게임기. 하지만 그런 건 어린 나한테 아무 상관이 없었다. 우리 집에 새턴이 있었고, 그 새턴이 CD로 돌아갔고, 슈퍼패미컴보다 더 좋아 보였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실제로 CD 매체의 차이는 체감이 컸다. 오프닝에 음성이 나왔다. 배경 음악의 음질이 달랐다. 화면 속 캐릭터가 더 많이 움직이고, 더 크고, 더 세밀했다. 슈퍼패미컴의 도트 그래픽에서 세가 새턴의 초기 폴리곤 그래픽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지금의 HD에서 4K로 가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완전히 다른 세계 같았다.
형이랑 때리고 부수던 게임
세가 새턴에는 다양한 게임이 있었지만, 그중 형이랑 가장 많이 한 건 다이너마이트 형사였다. 1996년에 세가가 아케이드용으로 만들고, 1997년에 세가 새턴으로 이식한 벨트스크롤 액션 게임. 해외에서는 영화 다이하드의 라이선스를 받아 ‘다이하드 아케이드’라는 이름으로 나왔지만, 일본과 한국에서는 다이너마이트 형사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고층 빌딩 이터널 타워를 점령한 테러리스트들에게 잡힌 대통령의 딸을 구하러 가는 스토리. 스토리가 중요한 게임은 아니었다. 중요한 건 눈앞에 보이는 모든 걸 집어서 때릴 수 있다는 거였다. 의자, 소화기, 쓰레기통, 심지어 고추냉이(!)까지. 주먹으로 패고, 발로 차고, 근처에 있는 걸 아무거나 들어서 던지고. 2인용으로 하면 형이랑 나란히 적을 두들겨 패는데, 그 단순한 쾌감이 끝내줬다.
형과 나는 역할을 나눈 적이 없었다. 그냥 둘 다 앞에 보이는 적을 닥치는 대로 팼다. 가끔 형이 집으려던 무기를 내가 먼저 집으면 형이 “야!” 하고, 내가 적한테 맞고 쓰러지면 형이 웃었다. 진지하게 협력한다기보다는 같은 화면 안에서 각자 신나게 두드리는 느낌이었다. 그게 좋았다.
잠수함으로 목숨을 벌던 시절
다이너마이트 형사에는 독특한 시스템이 있었다.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잠수함 미니게임을 할 수 있었다. 세가의 1979년 클래식 게임 ‘딥 스캔’을 모티브로 한 이 미니게임에서 점수를 올리면 본편의 크레딧, 그러니까 컨티뉴 횟수가 늘어났다. 오락실이라면 동전을 넣어야 할 컨티뉴를, 잠수함 게임을 잘하면 공짜로 벌 수 있었던 거다.
이걸 알게 된 순간부터 우리의 루틴이 바뀌었다. 다이너마이트 형사를 켜면 본편부터 시작하는 게 아니라, 먼저 잠수함 미니게임으로 크레딧을 최대한 늘렸다. 잠수함에서 어뢰를 발사해 적함을 격침시키는 단순한 게임이었는데, 이걸 반복하면 크레딧이 쌓였다. 목숨을 충분히 모은 다음에야 본편으로 들어갔다.
어릴 때 게임을 깨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실력이 좋거나, 목숨이 많거나. 우리는 후자를 택했다. 잠수함 노가다로 크레딧을 잔뜩 확보한 다음, 죽어도 죽어도 다시 일어나면서 끝까지 밀고 나갔다. 우아하지 않았지만 효과적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어떻게든 엔딩을 봤을 때의 성취감은, 실력으로 깬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적어도 어린 나한테는.
차세대의 기억
어른이 되어 이 시기를 돌아보면, 세가 새턴이라는 게임기의 위치가 보인다. 플레이스테이션과의 경쟁에서 밀렸고, 3D 성능에서 뒤처졌고, 서드파티 지원이 줄어들면서 결국 세가의 마지막 거치형 게임기 드림캐스트로 이어지는 쇠퇴의 시작점이었다. 하지만 2D 게임과 아케이드 이식에서는 오히려 플레이스테이션보다 뛰어났고, 캡콤 격투 게임이나 세가 아케이드 타이틀의 이식 퀄리티는 당시 최고 수준이었다.
다이너마이트 형사도 그런 게임이었다. 아케이드판을 거의 그대로 집에서 할 수 있다는 것. 그 시절 세가 새턴의 가장 큰 매력이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어릴 때는 그런 맥락을 몰랐다. 새턴이 플레이스테이션과 경쟁하고 있다는 것도, 결국 졌다는 것도, 나중에 안 사실이다. 나한테 새턴은 그냥 “CD를 넣는 게임기”였고, 다이너마이트 형사는 “형이랑 같이 때리는 게임”이었다. 게임기 전쟁 같은 건 어른들의 세계 이야기였고, 내 세계에서는 잠수함으로 목숨을 모아서 빌딩을 올라가는 게 전부였다.
지금은 형 없이 빌딩을 올라간다
다이너마이트 형사를 다시 하고 싶어서 찾아보니, 안타깝게도 이 게임은 현대 플랫폼으로 정식 복각되지 않았다. PS2로 ‘세가 에이지스 2500 시리즈 Vol.26’으로 이식된 적은 있지만, 닌텐도 스위치나 PS5 같은 현행 기기에서 공식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은 아직 없다. 세가 새턴 실기를 구하거나, 중고로 PS2판을 찾는 수밖에.
그래서 이 게임은 다른 게임들과 좀 다른 감정을 준다. 다시 하고 싶은데 쉽게 다시 할 수 없는 게임. 열혈물어나 커비 슈퍼 디럭스처럼 스위치에서 바로 켤 수 있는 게임과는 달리, 다이너마이트 형사는 기억 속에 있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
어쩌면 그게 세가 새턴이라는 게임기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좋은 게임이 많았지만, 시대의 경쟁에서 밀렸고, 그래서 복각이나 리마스터의 기회도 적었다. 다이너마이트 형사가 언젠가 현대 플랫폼으로 돌아온다면, 그때는 잠수함 미니게임부터 다시 시작할 거다. 크레딧을 잔뜩 모아서, 이번에는 혼자 빌딩을 올라가겠지. 형 없이도 깰 수 있다는 걸 이미 알지만, 옆자리가 비어 있으면 잠수함 미니게임이 좀 더 길어질 것 같다. 크레딧을 모으는 시간이 아니라, 형이랑 같이 했던 그 시간을 떠올리는 시간으로.
다이너마이트 형사, 지금 플레이할 수 있는 방법
현재 다이너마이트 형사를 현행 기기에서 공식적으로 플레이하는 방법은 제한적이다. PS2용 ‘세가 에이지스 2500 시리즈 Vol.26 다이너마이트 형사’가 일본에서 발매된 적이 있으며, 여기에는 아케이드판과 새턴판 모두 수록되어 있다. 세가 새턴 실기를 소장하고 있다면 중고 소프트를 구해 플레이할 수 있다. 후속작인 다이너마이트 형사 2는 드림캐스트로 발매되었고, 이쪽도 현행 기기 복각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다. 세가의 레트로 게임 복각 라인업에 포함되기를 기다리는 팬들이 적지 않은 타이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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