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 옆자리에서 시작된 열혈물어의 기억
형이 패미컴 앞에 앉으면 나는 늘 그 옆에 붙었다. 형은 싫은 소리 한 번 안 하고 자리를 내줬다. 왼쪽이 형, 오른쪽이 나. 우리 집 거실 카펫 위의 정해진 좌석이었다.
다운타운 열혈물어를 형이 처음 켰을 때, 나는 대여섯 살쯤이었을 거다. 1989년에 테크노스 재팬이 만든 이 패미컴 게임은, 열혈시리즈의 주인공 쿠니오가 거리를 걸으며 양아치들을 패고, 떨어진 돈으로 가게에서 음식을 사 먹으면 능력치가 올라가는 구조였다. 벨트스크롤 액션에 RPG 요소를 섞은 이 조합은 당시로서는 꽤 독특했는데, 어린 나한테는 그런 장르 구분 따위 없었다. 그냥 때리면 돈이 나오고, 돈으로 밥을 사 먹으면 더 세지는, 완벽한 세계였다.
형은 이 게임을 잘했다. 마하킥으로 적들을 쓸어버리는 걸 옆에서 보면 진짜 시원했다. 가게에 들어가서 일본어로 뭔가 사 먹는 것도, 뭔 소리인지 모르겠는 대화창을 읽고 다음 갈 곳을 아는 것도, 형이니까 가능한 거라고 생각했다. 형은 일본어를 아는 게 아니라 이미 여러 번 해봤거나 학교에서 친구한테 공략을 들은 거였겠지만, 그때의 나한테 형은 이 게임의 모든 걸 아는 사람이었다.
일본어를 모르면 절대 못 깨는 그 구간
그러다 형이 없는 어느 날, 혼자 패미컴을 켰다. 다운타운 열혈물어는 1인 플레이도 가능한 게임이었다. 쿠니오 혼자 출발해서 적을 패고, 돈을 모으고, 가게에서 밥을 사 먹는 것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형이 가던 방향으로, 오른쪽으로, 계속 오른쪽으로 가면 됐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막혔다. 창고 같은 곳에서 보스를 하나 이겼는데, 그다음이 없었다. 앞으로 더 가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학교 교문 같은 게 보이는데 들어갈 수가 없었다. 화면에 일본어 대화창이 떴지만, 히라가나도 가타카나도 몰랐다. 그냥 동그란 글씨들이 줄줄이 나오는 거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건 다운타운 열혈물어에서 가장 유명한 함정이었다. 마루카 운송 창고에서 니시무라를 이긴 다음, 앞으로 직진하는 게 아니라 왔던 길을 되돌아가서 하나조노 공원의 키노시타를 만나야 다음 보스인 코바야시가 등장하고, 레이호 학원 교문이 열리는 구조였다. 벨트스크롤 액션은 앞으로 가는 거라는 상식을 정면으로 배신하는 설계. NPC가 일본어로 힌트를 줬지만 그걸 읽을 수 없었던 한국의 꼬마들은 전국 각지의 거실에서 동시에 교문 앞에서 좌절하고 있었다.
그때는 인터넷이 없었다. 공략집이라는 게 있다는 것도 몰랐고, 안다 해도 구할 데가 없었다. 형한테 물어보면 됐겠지만, 형이 언제 올지 몰랐고, 나는 기다리다 지쳐서 게임을 껐다. 패미컴 전원 버튼을 내리면 “틱” 하고 화면이 꺼지는 그 느낌. 그게 내 열혈물어의 엔딩이었다.
어른이 되어 다시 켠 다운타운 열혈물어
그로부터 이십 몇 년이 지나서, 나는 이 게임을 다시 샀다. 닌텐도 온라인 같은 서비스 덕분에 패미컴 게임을 다시 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거다.
이번에는 인터넷 공략을 옆에 띄워놓고 시작했다. 니시무라를 이기고, 이번에는 알고 있으니까 왔던 길을 돌아갔다. 공원에서 키노시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녀석이 여기 있었구나. 이십 몇 년 전의 나는 여기까지 못 온 거구나.
키노시타를 이기고, 코바야시를 이기고, 교문이 열렸다. 어릴 때 한 번도 들어가보지 못한 레이호 학원의 교문. 안에 들어서는 순간 별다른 감동은 없었다. 그냥 8비트 배경에 적이 좀 더 센 스테이지가 나왔을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이걸 깨는 게 아니라, 그때의 나를 데리고 교문 안으로 들어간 기분이랄까.
끝까지 클리어하고 엔딩을 봤다. 솔직히 공략 없이는 이번에도 헤맸을 거다. 이 게임을 혼자 힘으로 깬 사람은 일본어를 읽을 줄 알았거나, 맵 전체를 수십 번 왕복한 근성의 소유자였을 거다. 형은 어느 쪽이었을까. 아마 학교에서 친구한테 들었겠지. “야, 거기서 돌아가야 돼.” 그 시절 공략은 입에서 입으로, 교실에서 교실로 전해지는 거였으니까.
엔딩 이후에 남은 것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걸 보면서 형한테 카톡을 보낼까 했다. “형, 나 열혈물어 깼다.” 그런데 아마 형은 “ㅋㅋ 갑자기?” 정도로 답하겠지. 그래서 안 보냈다.
대신 앱을 껐다. 패미컴처럼 “틱”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어릴 때 끈 건 포기였고, 지금 끈 건 마무리였으니까.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이건 내가 혼자서 끝낸 거니까.
다운타운 열혈물어, 이런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이 글을 읽고 “나도 그랬는데”라고 생각한 분이 있다면, 지금 다시 해보시길 권한다. 닌텐도 스위치 온라인에 가입하면 패미컴 라이브러리에서 바로 플레이할 수 있고, 인터넷에 한글 공략이 넘쳐나는 시대니까 교문 앞에서 다시 멈출 일은 없다. 그때 못 깬 게임을 지금 깨는 건 생각보다 괜찮은 경험이다. 게임을 클리어하는 게 아니라, 그 시절의 숙제를 하나 끝내는 기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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