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이 알려준 한 가지
열혈물어가 “형 옆에서 보는 게임”이었다면, 열혈하키는 “형한테 한 가지만 듣고 혼자 뛰어든 게임”이었다.
정식 명칭은 ‘이케이케 열혈하키부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대난투~’. 1992년 패미컴으로 나온 열혈시리즈의 하키 게임인데, 그 시절 우리 집에서는 그냥 “열혈하키”였다. 형이 먼저 했고, 나는 형이 하는 걸 봤고, 그러다 어느 날 형이 딱 한 마디를 해줬다. “퍽을 올리고 점프해서 타이밍 맞춰 치면 필살기 나와.” 그게 전부였다.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근데 그 한 마디면 충분했다. 열혈하키는 열혈물어와 달리 일본어를 몰라도 상관없는 게임이었다. 스토리를 읽어야 다음으로 넘어가는 게 아니라, 하키에서 이기면 됐다. 단순했다. 퍽을 넣으면 이기고, 이기면 다음 상대가 나온다. 읽을 게 없으니 막힐 일도 없었다. 열혈물어에서 교문 앞에 멈춰 섰던 나한테, 이건 해방감 같은 거였다.
때리면 열받고, 이기면 옷을 뺏는 게임
열혈하키의 매력은 하키라는 틀 안에서 벌어지는 엉망진창에 있었다. 퍽을 놓고 경기를 하는 건 맞는데, 실제로는 상대 선수를 스틱으로 패고, 태클하고, 뒹굴고, 그러다가 겨우 필살 슛을 쏘는 게임이었다. 하키라기보다는 빙판 위의 격투기에 가까웠다.
특히 좋았던 건, 상대 선수를 계속 때리면 얼굴이 벌겋게 변하면서 분노 상태가 되는 시스템이었다. 그 얼굴이 정말 웃겼다. 눈이 치켜 올라가고, 표정이 완전히 달라진다. 열받은 상태에서 상대가 난동을 부리다 퇴장당하면 그건 그것대로 전략이 됐다. 어린 마음에 일부러 한 명을 집중적으로 패서 열받게 만드는 재미가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꽤 악랄한 전략이었지만, 어린애가 발견한 첫 번째 전술이라는 점에서 봐줄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게임의 핵심이었던 코스튬 시스템. 상대 팀을 이기면 그 팀의 유니폼을 얻을 수 있었고, 다음 경기에 그걸 입고 나갈 수 있었다. 유니폼마다 공격력과 방어력이 달랐고, 전용 액션이 있는 것도 있었다. 검도부 옷을 입으면 죽도를 휘두르고, 야구부 옷을 입으면 키퍼가 배트로 필살 슛을 쳐낼 수 있었다. 하키인데 죽도를 들고 뛰는 게 말이 되냐고 물으면, 이건 열혈시리즈니까 된다고밖에 할 수 없다. 새로운 유니폼을 얻을 때마다 다음엔 뭘 입을지 고민하는 게 하나의 재미였다.
혼자서도 할 수 있다는 것의 기쁨
형한테 필살 슛 쏘는 법을 듣고 처음 혼자 했을 때의 기분을 아직 기억한다. 퍽을 가볍게 올리고, 점프해서, 타이밍을 맞춰 치면 — 쿠니오의 너츠 샷이 화면을 가로질러 키퍼를 날려버렸다. 그 순간의 쾌감. 형이 하는 걸 볼 때는 그냥 “오 멋있다”였는데, 내 손으로 직접 했을 때는 차원이 달랐다.
열혈물어는 일본어라는 벽 앞에서 게임을 꺼야 했지만, 열혈하키는 달랐다. 이기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읽을 필요 없이 이기기만 하면 됐다. 그게 어린 나한테 “혼자서도 할 수 있다”는 감각을 처음 준 게임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쉽지만은 않았다. 열혈고교 안의 부활들 — 검도부, 야구부 정도까지는 어떻게든 이겼다. 그런데 다른 고등학교와 붙기 시작하면서 난이도가 확 올라갔다. 백합여고의 곰돌이 슛은 대체 어떻게 막는 건지 몰랐고, 뒤로 갈수록 필살 슛을 쏴도 키퍼가 너무 잘 잡았다. 어린 나의 실력으로는 거기쯤에서 한계였다.
어른이 되어 끝까지 간 빙판
어른이 되어 이 게임을 다시 했을 때, 달라진 건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인터넷에 공략이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내 손가락이 그때보다 좀 더 말을 듣는다는 것.
필살 슛의 타이밍도 예전보다 안정적으로 잡혔고, 키퍼가 잡기 어려운 각도로 쏘는 법도 익혔다. 상대 키퍼 체력을 먼저 깎고 필살 슛을 때려 넣는 전략도 쓸 수 있게 됐다. 어릴 때는 그냥 신나게 패고 신나게 쏘는 게 전부였는데, 어른이 되니 이 게임에 생각보다 전술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코스튬 선택도, 선수 배치도, 언제 때리고 언제 쏠지도 다 계산이 필요한 게임이었다. 어릴 때는 몰랐던 깊이가 있었다.
결국 마지막 상대까지 이기고 엔딩을 봤다. 열혈물어처럼 어떤 극적인 순간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냥 “아, 이겼네”라는 담담한 감상.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 담담함이 맞는 것 같다. 열혈하키는 원래 그런 게임이었으니까. 거창한 스토리 없이, 이기면 다음으로 넘어가고, 또 이기면 또 넘어가고. 그 단순한 반복의 끝에 엔딩이 있다.
필살 슛은 형한테 배웠다
엔딩을 보고 나서 문득 생각했다. 이 게임에서 나한테 가장 중요했던 건 코스튬도, 엔딩도 아니었다. 형이 “퍽 올리고 점프해서 쳐”라고 한 그 한 마디였다. 그 한 마디가 없었으면 나는 필살 슛 없이 일반 슛만 쏘다가 검도부한테 졌을 거다.
형은 아마 그 말을 기억하지 못할 거다. 대수롭지 않은 한 마디였을 테니까. 하지만 나한테는 그 한 마디가 “혼자 해도 된다”는 허락이었다. 방법을 알려줬으니 이제 네가 해봐, 라는.
지금도 가끔 레트로 게임을 켤 때 그 감각이 돌아온다. 뭔가를 혼자 해보기 전에, 누군가한테 딱 하나만 듣고 시작하는 그 느낌. 결국 게임은 혼자 하는 거지만, 시작은 늘 누군가의 한 마디에서였다.
열혈하키, 지금 다시 할 수 있는 방법
열혈하키를 지금 플레이하고 싶다면 닌텐도 스위치 온라인에 가입하면 패미컴 라이브러리에서 바로 할 수 있다. 필살 슛 쏘는 법은 퍽을 A버튼으로 가볍게 올린 뒤, 점프하고 타이밍 맞춰 B버튼으로 치면 된다. 형이 없어도 이제는 인터넷이 알려주는 시대니까, 이번에는 교문 앞에서도, 빙판 위에서도 멈출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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