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뉴얼 속 캐릭터 그림을 틀려가며 시작했던 무협 RPG, 2편은 정말 나왔을까 – 녹정기

녹정기 타이틀화면

게임을 시작하기도 전에 막혔다

콘솔 게임과 달리 PC 게임에는 전원 버튼 하나로 해결되지 않는 관문이 있었다. DOS 시절 게임들이 가지고 있던 매뉴얼 프로텍션이다. 게임을 실행하면 화면에 질문이 하나 뜬다. 동봉된 종이 매뉴얼에서 특정 페이지를 펼치고, 거기에 있는 정답을 입력해야 게임이 시작되는 복사 방지 장치였다.

녹정기의 매뉴얼 프로텍션은 캐릭터 그림이었다. 매뉴얼에 여러 인물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고, 화면에 제시된 그림과 같은 캐릭터를 골라 입력해야 했다. 문제는 그 캐릭터들이 전부 비슷하게 생겼다는 것이다. 도트 그래픽으로 그려진 무협 인물들은 머리 모양이나 옷 색깔이 미묘하게 다를 뿐, 어린 눈에는 거의 같은 사람처럼 보였다. 한 번에 맞춘 기억이 거의 없다.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게임을 하기도 전에 매뉴얼을 펼치고 접고를 반복하다가, 겨우 맞추고 타이틀 화면이 뜨는 순간의 안도감.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만, 그때는 진지했다.

위소보와 함께한 첫 번째 무협 세계

녹정기(鹿鼎記): 황성쟁패는 대만의 게임 회사 지관이 1994년에 발매한 DOS용 2D RPG다. 김용의 소설 녹정기를 원작으로 한 게임으로, 한글판이 정식으로 나와 있었기에 대사와 스토리를 모두 한국어로 읽을 수 있었다. 주인공 위소보가 양주에서 모십팔을 만나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궁궐에 들어가 강희제와 친구가 되고, 천지회와 신룡교 사이를 오가며 사건을 겪는 이야기가 도트 그래픽 위에 펼쳐졌다.

형이 먼저 했고, 나는 옆에서 봤다. 한글로 되어 있었으니 대사를 읽을 수는 있었지만, 소설 원작의 맥락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궁중 암투와 강호 세력 다툼이 쉽게 이해될 리 없었다. 형이 “이건 위소보라는 애가 주인공이야, 무공은 약한데 말재주가 좋아”라고 설명해줬던 것만 기억난다. 턴제 전투에서 위소보가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무협이라는 장르를 처음으로 ‘경험’했다.

“2편을 기대해주세요”로 끝나버린 이야기

녹정기 1편은 소설 원작의 전반부만을 다루고 있다. 위소보가 모십팔을 만나는 것부터 시작해서, 금각사에서 강희제 부자가 상봉하는 장면까지가 게임의 내용이다. 소설 전체 분량의 절반 정도에서 이야기가 끊기고, 화면에는 후속작을 기대하라는 메시지가 떴다. 어린 나에게 그건 “다음 편이 곧 나온다”는 약속처럼 들렸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2편 소식은 없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게임 자체를 잊어버렸다.

그리고 30년이 지나서 이 글을 쓰기 위해 찾아봤다.

2편은 진짜 나왔다

찾아보니 녹정기 2(鹿鼎記 Episode II)는 2000년 2월 15일에 발매되었다. 같은 회사인 지관이 퍼블리싱했고, 개발은 SnowWolf Studio가 담당했다. 1편이 2D 도트 그래픽이었던 것과 달리, 2편은 사선형 3D 화면으로 바뀌었고 CD 4장짜리 대용량 게임이었다. 스토리는 1편이 끝난 지점 — 위소보가 건녕공주를 호송하며 운남으로 출사하는 장면 — 에서 바로 이어진다. 이후 오삼계의 반란, 러시아 야삭성 원정, 양주 귀향까지 소설 후반부의 주요 사건을 다루며, 대체로 원작에 충실한 전개를 보인다.

6년을 기다리면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몰랐다. 2000년이면 내가 열 살이었고, 그때는 이미 녹정기를 잊고 다른 게임을 하고 있었다. 정보를 찾을 수단도 제한적이었다. 인터넷이 있었지만 열 살짜리가 대만 게임의 속편 발매 소식을 추적할 리 없었다. 게다가 2편은 한글판이 나왔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1편처럼 한글로 즐길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설령 나왔더라도 그 시절의 나에게 닿을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2편을 기대해주세요”라는 약속은 지켜졌는데, 약속을 받은 쪽이 까맣게 잊고 있었던 셈이다.

김용 소설을 읽게 된 이유

학창 시절에 김용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다. 녹정기, 의천도룡기, 사조영웅전. 친구들은 “무협 소설을 왜 좋아해?”라고 물었는데, 돌이켜보면 이유는 단순했다. 어릴 때 게임으로 먼저 만났기 때문이다. 녹정기 게임에서 위소보를 조작했고, 의천도룡기외전에서 장무기를 키웠다. 한글로 된 대사를 읽으면서 무협의 분위기와 캐릭터의 이름이 머릿속에 남았고, 그래서 소설을 펼쳤을 때 처음 읽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 그때 그 게임”이라는 감각이 먼저 왔다. 게임이 소설의 예고편이 되어준 것이다.

의천도룡기외전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관의 김용 게임 시리즈는 어린 나에게 무협이라는 장르의 입구였고, 그 입구를 지나 소설이라는 넓은 세계로 걸어 들어간 셈이다.

매뉴얼은 없어졌지만 기억은 남았다

비슷하게 생긴 캐릭터 그림을 눈 비비며 구분하던 시절은 끝났다. 매뉴얼 프로텍션은 사라진 지 오래고, 지금은 게임을 실행하는 데 아무런 관문이 없다. 하지만 그 번거로움이 없었다면 게임을 시작하는 순간의 성취감도 없었을 것이다. 암호를 맞추고 타이틀 화면이 뜨는 순간, “드디어 들어왔다”는 느낌. 원클릭 실행의 시대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각이다.

형에게 “녹정기 2편 나왔더라, 2000년에”라고 말하면 형은 뭐라고 할까. 아마 “그래? 나도 몰랐는데”라고 할 것 같다. 우리 둘 다 약속을 잊고 있었다. 30년 만에 지켜진 약속을 확인한 건, 이 글을 쓰는 나 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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