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날 옷을 입은 쿠니오가 나온다
형이 새 카트리지를 꽂으면 나는 항상 옆자리로 갔다. 그날도 그랬다. 화면에 쿠니오가 나왔는데, 평소와 달랐다. 교복이 아니라 옛날 옷을 입고 있었다. 건물도 나무로 되어 있었고, 거리에는 달구지가 굴러다녔다. “이거 옛날 이야기야?” 하고 물으니 형은 “시대극이래”라고 했는데, 그때 나는 시대극이 뭔지도 몰랐다. 그저 쿠니오가 옛날 배경에서 싸우는 게 신기했을 뿐이다.
정식 제목은 다운타운 스페셜 쿠니오군의 시대극이다 전원집합! — 1991년 7월 26일 패미컴으로 발매된 열혈 시리즈의 스페셜 작품이다. 열혈물어의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되 레벨업과 경험치 시스템을 도입했고, 중세 일본(에도 시대)을 배경으로 시리즈 캐릭터들이 시대극을 ‘촬영’한다는 콘셉트를 갖고 있다. 지금 생각하면 용과 같이 켄잔이나 유신의 원조격인 셈인데, 어린 나에게는 그냥 “옛날 배경의 열혈물어”였다.
안경 낀 애, 너 이름이 뭐였어
쿠니오 옆에 항상 따라다니는 캐릭터가 있었다. 안경을 쓰고, 싸움은 좀 약하고, 가끔 맞으면 나자빠지는 애. 형도 나도 “안경 낀 애”라고만 불렀다. 쿠니오와 리키의 이름은 다른 게임에서도 나오니까 자연스럽게 알았지만, 나머지 캐릭터의 이름까지 챙길 여유는 없었다. 일본어를 읽을 수 없으니 나레이션이 나와도 버튼을 연타해서 넘겼고, 누가 누군지보다 어디서 싸울 수 있는지가 더 중요했다.
30년이 지나서야 알게 됐다. 그 안경 낀 애의 이름은 츠루마츠(つるまつ)다. 동료 시스템으로 함께 다니는 캐릭터인데, 여러 번 때리면 안경이 깨지기도 하고, 배신을 하기도 한다고 한다. 당시에는 그런 시스템이 있는 줄도 몰랐다. 나무위키를 읽으며 “이 게임 이렇게 깊었어?”라고 혼잣말을 했다. 캐릭터마다 고유 필살기가 있었고, 맵은 전부 연결되어 있어서 어디서든 떨어져도 죽지 않는 구조였다. 도박장에서 세이브·로드를 반복하며 돈을 불릴 수도 있었다. 어릴 때는 그냥 앞에 나오는 적을 때리고 지나간 것뿐이었는데, 그 안에 이만큼의 설계가 숨어 있었다.
시대배경을 몰라도 재미있었던 이유
시대극이라는 장르를 이해한 건 한참 뒤의 일이다. 에도 시대 일본이라는 배경, 라쿠고풍 나레이션, 캐릭터 이름이 시대극식으로 바뀌어 있는 것 — 이 모든 맥락을 모른 채로 플레이했다. 그런데도 재미있었다. 옛날 옷이 멋있어 보였고, 달구지를 밀어서 적을 깔아뭉개는 게 웃겼고, 두레박을 적 머리에 씌우면 적이 허우적대는 게 신났다. 어린아이에게 문화적 맥락은 필요 없었다. 때리면 넘어지고, 넘어지면 웃기고, 웃기면 그게 좋은 게임이었다.
지금 다시 해보면 나레이션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고, 맵 구석구석에 숨겨진 상점과 이벤트를 찾을 수 있다. 그 차이가 이 게임을 두 번 즐기게 해준다. 한 번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로서, 한 번은 전부 읽을 수 있는 어른으로서.
형 옆자리에서 보던 것과 혼자 하는 것
열혈시대극은 열혈물어와 달리 일본어 때문에 완전히 막히지는 않았다. 물어처럼 특정 경로를 되돌아가야 하는 구간이 없이, 맵을 돌아다니며 적을 쓰러뜨리면 보스가 등장하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넓은 맵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순간은 있었고, 그때마다 형이 “저쪽으로 가봐”라고 알려줬다. 형이 없는 상태에서 혼자 하면 맵에서 헤매다 결국 껐던 기억도 있다.
어른이 되어 인터넷 공략을 보며 다시 플레이하니, 형이 가리키던 “저쪽”이 정확히 어디였는지 알게 됐다. 비밀 상점의 위치, 맵 이동 아이템의 존재, 도박장에서 돈을 불리는 방법까지. 공략을 읽는 건 편리하지만, 형의 손가락이 가리키던 방향만큼 따뜻하지는 않았다.
츠루마츠, 30년 만에 이름을 불러줄게
열혈시대극을 다시 꺼내 든 건 닌텐도 스위치의 “쿠니오 군: 더 월드 클래식 컬렉션” 덕분이었다. 열혈시대극 전원집합을 포함한 열혈 시리즈 타이틀이 수록되어 있어 별도 카트리지 없이 플레이할 수 있다. 2025년 4월에는 “열혈 & 아케이드 클래식 컬렉션”이 스위치·PS5·Steam으로 발매되기도 했다. 선택지가 이렇게 많아진 시대에, 그때 형과 나는 하나뿐인 카트리지를 돌려가며 했다.
다시 플레이하면서 츠루마츠를 처음으로 이름으로 불렀다. “안경 낀 애”가 아니라 츠루마츠. 이상하게 그 순간이 오래 남았다. 이름을 몰랐던 시절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이름 없이도 함께 돌아다녔던 그 시간이 그리웠다. 형에게 “형, 그때 안경 낀 애 이름이 츠루마츠래”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형은 “ㅋㅋ 나도 몰랐는데”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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