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팩을 꽂아야 게임이 됐을까? – 킹오브파이터즈 97

KOF97

팩을 꽂아야 게임이 됐다

세가 새턴으로 킹오브파이터즈 97을 하려면 본체에 뭔가를 꽂아야 했다. 새턴 뒤쪽에 있는 슬롯에 팩 같은 걸 끼우는 건데, 형이 “이거 꽂아” 하면 시키는 대로 꽂았다. 왜 꽂아야 하는지는 몰랐다. 그냥 이걸 안 꽂으면 게임이 안 된다는 것만 알았다.

커서 찾아보니 그게 확장 RAM 카트리지였다. 새턴의 비디오 메모리를 늘려주는 장치로, SNK 격투게임들을 새턴에서 돌리려면 필수였다. KOF 97은 1MB짜리 RAM 팩이 필요했고, 게임 패키지에 팩이 동봉되어 나오기도 했다. 이 팩을 꽂으면 캐릭터 애니메이션 프레임이 늘어나고 로딩도 빨라졌다고 한다. 그런데 새턴의 카트리지 슬롯이 접촉 불량으로 악명이 높았기 때문에, 팩을 꽂았는데 인식이 안 되는 일도 자주 있었다. 그때 형이 팩을 빼서 후후 불고 다시 꽂던 장면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폭주 이오리를 골라줬다

캐릭터를 고르는 건 형의 몫이었다. 나는 캐릭터가 누군지도 잘 몰랐으니까. 형이 캐릭터 선택 화면에서 뭔가 빠르게 조이스틱을 돌리더니 폭주 이오리를 골라줬다. 그때는 그냥 “이오리인데 좀 다르게 생긴 애”라고만 생각했다. 평소 이오리보다 움직임이 거칠고 소리도 더 무서웠다.

지금 확인해 보니 폭주 이오리의 정식 이름은 “달밤에 오로치의 피에 미친 이오리”였다. 이름부터가 심상치 않다. 숨겨진 캐릭터라서 선택 화면에서 스타트 버튼을 누른 채로 ←→←→←→ + AC를 입력해야 고를 수 있었다. 형은 이걸 외우고 있었던 거다. 어린 나한테는 형이 마법을 쓰는 것처럼 보였을 거다.

콤보는 몰랐다

솔직히 콤보 같은 건 몰랐다. 약펀치에서 강펀치로 연결하고 거기서 필살기로 캔슬하는 그런 체계를 이해하기엔 너무 어렸다. 그냥 필살기 커맨드를 외워서 그것만 쓰는 게 전부였다. ↓↘→ 같은 커맨드를 돌리면 보라색 불꽃이 나가는 게 신기했고, 그게 맞으면 기분이 좋았다. 폭주 이오리는 평소 이오리의 기술과 다르게 잡기 위주의 거친 기술들이 많았는데, 그때는 그런 차이를 의식하지 못했다. 그냥 “이 캐릭터로 하면 잘 이길 수 있다”는 감각만 있었다. 형이 폭주 이오리를 골라준 데는 이유가 있었을 거다. 콤보를 모르는 동생이 필살기만 눌러도 어떻게든 앞으로 갈 수 있는 캐릭터였으니까.

마지막 보스까지 갔다

스토리 모드를 쭉 진행하면 마지막에 보스가 나왔다. 오로치. KOF 97의 최종 보스이자 오로치 편 3부작의 마지막 적이었다. 그때는 “엄청 강한 마지막 적”이라는 것만 알았다. 빛이 번쩍이면서 화면 전체를 덮는 공격을 해 왔는데, 어떻게 피해야 하는지 모르고 그냥 맞으면서 필살기를 눌렀다. 폭주 이오리로 오로치를 이기면 특별한 엔딩이 나오는지 아닌지도 기억이 안 난다. 그냥 “끝까지 갔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

지금 보니 오로치는 일본 신화의 야마타노오로치에서 모티브를 따온 캐릭터고, KOF 시리즈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 중 하나로 꼽힌다. 삼신기 팀(쿄, 이오리, 치즈루)의 엔딩에서 이오리가 오로치를 붙잡고 쿄가 마무리하는 연출이 유명한데, 그런 스토리를 아는 상태로 다시 하면 느낌이 완전히 다를 것 같다.

킹오파는 형의 게임이었다

킹오브파이터즈는 나보다 형의 게임이었다. 형이 캐릭터를 골라주고, 형이 숨겨진 커맨드를 입력해 주고, 형이 “이 기술은 이렇게 써” 하고 알려줬다. 나는 형이 깔아놓은 길 위에서 버튼만 눌렀을 뿐이다. 그런데 그게 재밌었다. 혼자서는 절대 못 했을 게임을 형 덕분에 끝까지 할 수 있었으니까. 폭주 이오리의 거친 기합 소리와 보라색 불꽃, 새턴 컨트롤러의 묵직한 버튼 감촉, 그리고 RAM 팩을 꽂을 때 딸깍 하던 소리. 킹오파 97의 기억은 게임 자체보다 그 주변의 감각들로 남아 있다.

지금 다시 하려면

KOF 97은 글로벌 매치 버전으로 2018년 4월에 PS4·PS Vita·Steam으로 출시됐다. 온라인 대전도 지원하고, 숨겨진 캐릭터도 더 쉽게 고를 수 있다. 새턴에 RAM 팩을 꽂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가끔 생각한다. 왜 끼는지도 모르면서 팩을 꽂고, 콤보도 모르면서 필살기를 누르던 그때가 오히려 더 재밌었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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